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 상륙작전 (문단 편집) === 북한군의 예측 === || [youtube(bXA_Ad6EGz8)] ||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했다.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과 동해안의 원산 모두 후보지로 예상했다. 또한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설령 한 곳만 주공이고 나머지가 조공이라고 해도 모두 다 대비해야 하는데다가 어느 한 곳이 제대로 뚫리면 그 쪽으로 주공이 전환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운데도 [[린뱌오]]와 같은 전략가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60424.html|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다. 이에 동의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과[* 이쪽은 작살나기 전에도 전력이 변변찮았다는건 넘어가자.]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 외에도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에게서 노획한 물자들을 부평에 집중시켜서 상륙작전같은 상황이 닥치면 근방에 예비병력을 집중시킨 후에 물자를 나누어주고 무장시켜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려고도 했다.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과 [[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한 것이다.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병력이 처음 상륙했을 때 당장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쓸만한, 앞서 언급한 육군 18사단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낙동강으로 가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내려가 버렸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 제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